여성해방의 비극

여성해방의 비극

엠마 골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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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mitted by dogej63 on April 2, 2023

엠마 골드만이 1906년에 쓴 이 글은 아나키스트인 E. 아르망의 번역으로 2003년 잡지 〈아곤Agone〉에 게재됐으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자매지인 격월간 〈마니에르 드부아Manière de voir〉 2011년 8 · 9월호에 재수록 됐다.

먼저 나는 내가 주장하려는 바를 말하고 싶다. 모든 정치 · 경제이론, 계급과 인종 간 차이, 여성의 권리와 남성의 권리 간 인위적 경계가 없는, 오히려 서로 다른 점들이 잘 어울려, 또 하나의 완전한 개체를 완성하는 지점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평화와 조화를 위해 반드시 개인 간의 피상적 균등화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남녀 간, 개인 간 평화와 조화를 이루기 위해 개인 간 특성을 제거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가 고찰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는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타인과 화합하는 것, 타인과 깊은 교류를 하면서도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는 대중과 개인, 진정한 민주주의와 진정한 개인주의, 그리고 남성과 여성이 그 어떤 적대감이나 갈등 없이 만날 수 있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관건은 용서가 아니라, 이해다. 마담 스타엘이 자주 인용하는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은 모든 것을 용서하는 것이다”라는 말은 내게 감흥을 주지 못했다. 타인을 용서하는 것은 바리사이Pharisees(기원전 1세기~기원후 1세기, 극도로 엄격한 율법 해석과 실천을 내세우던 학파 또는 그 학파에 속한 사람들-역자 주)의 권위 같은 우월한 개념을 연상시킨다. 이해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는 여성해방에 대한 내 견해와 모든 여성에 대한 여성해방의 영향을 부분적으로 구현하는 말이다.

관건은 균등화가 아닌, 평화와 조화

여성해방은 여성에게, 진실로 인간적인 존재가 될 가능성을 부여한다. 자기 확신과 활동에의 요구는, 가장 완전한 자기 자신의 표현으로 귀결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보다 큰 자유로 가는 길목에 잔재하는 굴종의 시대와 노예제도의 흔적을 제거해야 한다.

이는 여성해방운동의 본래 목적이었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결과를 보면, 이 목적이 오히려 여성을 고립시키고 여성에게서 행복을 앗아갔다. 외적 해방은, 현대의 여성을 기하학적 형태로 길러진 화초처럼 인공적인 존재로 만들어버렸다. 소위 ‘지성인’들 중에 이런 ‘인공적 여성’이 많다.

“여성에게 자유와 평등을!” 고상하고 용감한 현대의 지성인들이 이 말을 처음 던졌을 때, 그 때 느꼈던 희망과 열망은 형언할 수 없다. 여성 스스로가 운명을 개척해가는 새로운 세계에, 태양이 찬란한 빛을 발하며 영광스럽게 떠오를 것이다. 이는 편견과 무지로 부패한 세계에 맞서기 위해 모든 위험을 무릅쓰는 선각자들의 열정, 용기, 인내, 끊임없는 노력에 부합한 목적이다. 그러나 여성노동자들은 가정에서의 편견과 구속을, 공장에서의 편견과 구속으로 맞바꿨을 뿐이다. 그 결과, 여성들은 과연 어떤 독립을 쟁취했는가?

내 희망은 해방을 지향한다. 그러나 현재 여성해방은 완전히 실패한 상태다. 여성이 진실로 해방되기를 원한다면, 먼저 해방으로부터 해방돼야 한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이것이야말로 적확한 표현이다. 여성해방을 통해 여성은 무엇을 얻었는가? 일부 국가에서의 참정권이다. 이 결과로 수많은 여성투표 주창자들이 예언했듯, 정치권이 정화됐는가? 답은 물론 ‘No’다. 지금이야말로, 건전하고 명확한 사고력을 가진 이들이 보수적인 어투로 ‘정치계의 부패’에 대해 말하는 것을 중단해야 할 때다. 정치계의 부패는 다양한 정치권 인사의 윤리, 또는 도덕적 해이와는 무관하다. 부패의 원인은 순전히 물질적인 것이다. 정치는 ‘주는 행복보다 취하는 행복이 더 크다’, ‘헐값으로 사서 비싸게 되팔아라’, ‘더러운 손이 다른 손을 깨끗하게 한다’ 등의 원칙이 통하는 상업적 논리를 반영한다.

행복의 근원을 빼앗아간 해방?

여성해방은 여성에게 남성과 동등한 경제적 위치를 부여했다. 여성이 직업을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과거와 현재의 교육은 여성에게 경쟁력을 부여하지 못했다. 따라서 여성은 시장에서 원하는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매번 모든 에너지를 쏟아야만 한다.

게다가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 도달한 여성은 소수에 불과하다. 여교사, 여의사, 여성 건축가, 여성 엔지니어들이 동일 직종의 남성들과 동일한 수준의 신뢰도, 보수도 받지 못한다는 것은 모두 아는 사실이다. 이런 ‘가짜 평등’에 도달한 여성들은 대부분 육체적 · 정신적 희생을 담보로 했다. 대다수의 여성노동자들에게 변화라고는, 그들이 편견과 구속을 받는 장소가 가정에서 공장, 상점, 사무실 등으로 바뀐 것이 전부다. 그 결과, 여성들은 과연 독립을 쟁취했는가? 많은 여성들이 고된 일과를 마친 후 따뜻하게 반겨줄 이 한 명 없는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를 진실로 영광스러운 독립이라고 할 수 있는가?

수백 명의 젊은 여성들이 계산기와 재봉틀, 타자기로 ‘독립’을 이어가는 데 지친 나머지, 결혼을 돌파구로 여기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는 중산층의 젊은 여성들이 부모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결혼을 선택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간신히 밥벌이를 하는 수준의 독립생활은 그다지 행복하지도, 이상적이지도 않다. 즉 큰 목소리로 여성에게 독립생활에의 환상을 심어주는 것은, 사랑과 모성이라는 이성의 본능을 억누르는 방편, 그것도 별반 효과적이지 못한 방법에 불과하다.

여성독립과 여성해방에 대한 편협한 기존의 개념들, 여성이 지닌 사회적 지위가 남성과의 사랑을 가로막게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사랑이 여성에게서 자유와 독립을 앗아갈 수 있다는 두려움, 사랑과 모성의 기쁨이 일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는 불안 등의 감정은 해방된 현대여성에게 독신을 강요한다. 그리고 그렇게, 삶은 지나간다.

사랑을 두려워할 때 해방은 없다

여성해방은 연인이나 아내로서의 여성, 어머니로서의 여성의 감정을 마음껏 표출하기에는 너무나 좁은 비전을 제시한다. 이는 여성해방을 추구하는 여성들 대부분이 느끼는 바다. 경제적으로 독립한 현대여성은 지식적인 측면에서 이전 세대의 여성을 앞서간다. 그러나 이로 인해 본질적인 삶의 결핍을 느낀다. 다름 아닌 사랑의 결핍을 느끼는 것이다. 인간의 영혼을 풍요롭게 하는 유일한 것은 사랑이다. 그러나 많은 여성들이 사랑의 결핍으로 인해, 일하는 로봇이 돼버렸다. 기존 제도를 파괴하고, 보다 진보적인 제도로 대체하려는 운동에는 지지자들이 있다. 지지자들은 이론적으로는 근본적인 사상을 옹호하지만, 일상에서는 평범한 속물에 불과하다. 그들은 존경을 갈구할 뿐이다. 그들은 “소유는 도둑질”이라고 주장하면서, 누가 자신의 머리핀 하나만 가져가도 분개한다. 그리고는 자신이 ‘사회주의자’, 나아가 ‘아나키스트’라고 주장한다.

여성의 자유와 남성의 자유, 깊은 연관성

여성해방운동가들 중에도 이런 속물들이 있다. 신출내기 기자와 삼류 문인들은 해방된 여성의 모습을 왜곡시켰다. 예를 들어 조르주 상드 같은 여성해방운동가들이 마치 도덕성을 결여한 것처럼 묘사한 것이다. 따라서, 여성해방은 반사회적인 삶, 부도덕하고 방탕한 삶, 사치스러운 삶과 동의어가 돼버렸다.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여성들은 이에 분노한다. 그리고 이런 여성해방운동가들에 대한 인식이 왜곡됐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에너지를 쏟는다. 여성이 남성의 속박 아래서 신음하던 동안, 여성은 선량할 수도 순수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여성이 자유와 독립을 쟁취했을 때 얼마나 선량할 수 있는지, 그리고 여성의 영향력이 사회의 모든 기관을 정화하는 효과가 있는지 여성해방운동가들은 증명하려 했다.

진정으로 해방으로 가는 위대한 노정에서 자유를 직시할 수 있는 여성은 발견되지 않았다. 여성들은 청교도적이고 위선적인 관점으로 남성을 방해자로 여기거나, 의혹의 눈초리로 바라보며 자신의 사생활에서 추방해버렸다. 남성을 아이의 아버지로 용인한 것은, 아이 아버지가 없으면 살기 어려운 현상 때문이었다. 다행히 엄격한 청교도적 시선도 모성이라는 선천적 열망을 없앨 수는 없었다. 그러나 여성의 자유는 남성의 자유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해방된 많은 여성동지들은 자유 속에서 태어난 아이가 사랑과 헌신을 원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듯하다. 아이 자신을 둘러싼 남자와 여자, 모든 사람들의 사랑과 헌신을 말이다. 현대여성과 남성의 삶에서, 비극은 인간관계에 관한 이런 편협한 개념에서 비롯된다.

향유하는 만큼만 자유롭다

여성들은 종종 풍부한 지성과 아름다움을 갖출 것을 강요받고는 한다. 현대여성들은 이런 속성이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드러내는 데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한다.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라는 고대 성경 속의 결혼 문구가 여성에 대한 남자의 주권, 즉 남자의 변덕과 명령에 대한 여성의 절대적 복종, 여성의 완전한 의존을 함축하는 장치라는 사실이 알려진 지 한 세기도 더 지났다. 기존의 부부관계가 여성을 남자의 종으로, 출산의 도구로 전락시켰다는 사실은 끊임없이 그리고 명백하게 증명되어 왔다. 그러나 우리는 해방된 여성들 중 상당수가 여성의 본성을 훼손하고 구속하는 도덕적 · 사회적 편견 때문에 고립된 독신생활을 견디는 것보다, 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선호하는 것을 봐왔다.

여성들은 이 사실을 명심하자. 여성의 자유는 여성 스스로 해방되는 능력을 향유할 수 있는 곳까지 확대된다는 사실 말이다.

수많은 진보적 여성들이 이런 모순에 부딪히는 것은 해방이 의미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보적 여성들은 스스로 외부의 압박에서 자유로워짐으로써 모든 것을 성취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윤리 · 사회적 관습, 개인의 삶과 성장에 훨씬 위험한 내부적 압박은 그대로 방치했다. 이런 것들은 과거 여성들의 머리와 마음에 새겨진 것만큼이나, 가장 활동적인 여성해방운동가들의 머리와 마음에도 똑같이 큰 자리를 차지했다. 이런 내부의 압제자들이 여론 형태로 나타나든, 혹은 엄마 · 숙모 · 이웃 · 아빠 · 고용주 혹은 징계위원회가 말하는 형태로 나타나든 상관없다.

이런 모든 부조리에 저항하고, 감시자에게 대항하고 자기 영역에서 굳건히 설 수 있어야 해방된 여성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삶의 가장 큰 선물인 사랑할 자유, 여성 고유의 능력인 출산의 자유를 거리낌 없이 주장할 수 있어야 해방된 여성이라 할 수 있다.

한 현대소설가는 해방된 여성의 이상형을 자신의 책에 묘사했다. ‘그 이상적인 해방여성’은 젊은 여의사로, 가난한 이웃들에게 무료로 약을 제공하는 자애로운 이웃이자 자녀들에게는 지혜로운 어머니다. 소박하고 실용적인 옷차림을 즐기는 그녀는 지인인 젊은 남성에게 박테리아와 바이러스를 전멸시키는 방법에 대해 설명한다. 마루와 벽을 돌로 만들고, 양탄자와 커튼을 없애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녀의 해박한 지식에, 남성은 처음에는 위축되지만 차츰 호감을 느끼게 된다. 두 젊은 남녀는 서로 호감을 느끼지만, 시종일관 담백한 관계를 유지한다. 로맨스라고는 없는 두 사람의 관계는 선을 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솔직히 그 여의사가 꿈꾸는 돌벽과 돌마루처럼 차디찬 남녀간의, 이 ‘새로운 아름다운 관계’를 전혀 위대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이런 단정함과 질서정연한 명료함보다는 낭만주의 시대의 로맨틱한 발라드, 돈 주앙, 달밤의 납치극, 줄사다리, 아버지의 저주, 어머니의 탄식과 분개한 이웃의 소란스러움이 더 매력적이다. 어떤 제약 없이 자연스럽게 오가는 감정이 아니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손익을 염두에 둔 거래에 불과한 것이다.

적대적 이원론을 극복해야 완성된다

구원은, 미래를 향해 힘차게 발을 내디딜 때 찾아온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낡은 전통과 구시대의 관행을 던져버리고 전진하는 것이다. 여성해방운동은 이런 방향의 첫걸음을 내딛은 것에 불과하다. 여성해방운동은 그 두 번째 걸음을 내딛기 위해 충분한 힘을 비축해야할 것이다. 동등한 시민 투표권 행사는 바람직한 요구사항이지만, 진정한 해방이 시작되는 곳은 투표장이나 법정이 아니다. 다름 아닌 여성의 영혼이다. 역사는 말한다. 피지배자들이 지배자에게서 진정으로 해방된 것은, 어떤 시대에나 그들 자신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음을. 자유는 스스로 ‘자유로워질’ 능력이 있을 때 주어진다는 교훈을 새길 필요가 있다. 그러려면 내부 개혁, 곧 편견과 전통, 관습의 무거운 짐을 벗어버려야 한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남성과 동등한 권리 요구는 물론 정당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하고 사랑받을 권리다. 부분적인 여성해방이 여성의 진정하고 완전한 해방이 되려면, 여성으로서 사랑받고, 아내가 되고 어머니가 되는 것이 노예가 되고 종속되는 것이라는 우스꽝스러운 공식을 버려야 한다. 여성은 남녀이원론이란 불합리한 개념을 버려야 한다. 남성과 여성이 적대하는 두 개의 세상을 형성한다는 이원론적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편협함은 분리를 낳지만, 관대함은 화합으로 이끈다. 좀 더 너그럽고 관대해지자. 여성과 남성은 정복자와 피정복자가 아니다.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무한한 헌신이다. 헌신은 스스로를 한층 풍부하게 하고 확신을 주며, 보다 나은 방향으로 이끈다. 이런 태도만이 공허한 마음을 채워주고 여성운동의 비극적인 결과를 무한한 기쁨으로 승화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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