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인생'이라고 자조하는 탄광노동자-광부들에게 현실은 캄캄한 막장만큼이나 어두웠다. 호흡조차 곤란한 수백 수천 미터 지하막장에서 진폐증에 시달리며 탄을 캐내도 월 평균 임금은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15만5천원이었다.
이들의 사택은 6평 남짓한 방 한 칸에 부엌 하나가 전부였다. 시커먼 탄가루를 씻어내려면 꼭 필요한 목욕탕이 없는 것은 물론 따뜻한 물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생활필수품도 회사에서 지정해놓은 매점에서 비싼 값에 사야했다.
'막장인생'을 아는가
1980년 전후 연간 전국 채탄량의 11%인 2백30만 톤을 캐내 민영탄광 가운데 제일 크다는 강원도 정선 사북 동원탄좌 광부들의 사정이 이러했다.
그런데도 노동조합 지도부는 오로지 자리 지키기와 저들이 던져주는 떡고물에만 한눈을 팔고 있었다. 1979년 6월 어용노조를 타파하는 것이 살길이라고 본 노조민주화 세력이 지부장 선거에 나섰으나 부정선거로 이재기가 다시 뽑혔다.
1980년 4월 전국광산노동조합연맹이 42% 임금인상을 위해 싸울 것을 결의하고 있는 상황에서 동원탄좌 지부장 이재기는 회사와 비밀리에 임금 20% 인상에 합의하였다. 사정이 나은 큰 노동조합에서 20%로 합의해 버리면 작은 노동조합에서는 10% 인상도 어려워질 게 눈에 뻔한 상황이었다.
노동조합 민주화를 추구하던 노동자 25명이 4월15~17일 임금문제와 지부장 선거 문제로 전국광산노동조합에 상경투쟁을 벌였다. 사북으로 돌아와 지부장과 대화를 시작하자 광부들이 모여들어 시위를 벌였다. 지서장과 읍장, 회사측 노무계장이 집회허가를 약속했다.
4월21일 정선 계엄분소에서 집회를 불허하였으나 동원탄좌 노동자들은 지부 사무실에서 이재기 지부장 사퇴와 임금 40%인상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경찰이 사무실을 포위하고 노동자로 위장하여 농성장에 잠입했다 탈출하는 과정에서 지프차로 노동자 4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노동자 500여 명은 사북지서를 점거하였다. 사실상 지역을 장악한 것이다. 시위대는 1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4월22일 강원도 경찰국장의 지휘 아래 소총으로 무장한 경찰병력 300여 명이 사북으로 들어왔다. 5천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대는 경찰을 사북읍에서 완전히 몰아냈다. 공수부대 투입 소문이 퍼지자 경찰과 예비군 무기고·화약고를 점거하였을 뿐만 아니라 탄을 캐는데 쓰던 회사의 다이너마이트도 장악하였다. 계엄하에 공권력 투입을 지체시켰던 중요한 물리력이었다.
탄광 노동자들이 시작한 투쟁에 주부와 지역주민들이 적극 참가하면서 '사북사태'는 대중적인 민중항쟁으로 확대되었다. 노동자들은 자치방범대를 뽑아 치안을 유지했다. 21일부터 24일까지 사북은 '무지랭이' 광부들과 하층 민중이 공권력을 무장해제 시키고 지역을 장악한 '해방구'였다. '지역점거'라는 투쟁형태를 통해 국가의 공권력을 완전히 마비시킨 사북 노동자·민중은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공권력이 없어도 생활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것을 경험했다고 한다.
한편 강원도지사 김성배를 위원장으로 하고 회사측 고위간부와 경찰, 광노위원장으로 구성된 대책위원회와 항쟁지도부 이원갑, 신경 등 20~25명으로 구성된 대표단이 협상을 시작하였다. 24일 아침 임금인상과 관련자 처벌 금지를 포함한 11개항에 합의하고 협상이 끝났다. 노동자들이 장악했던 무기와 화약고를 경찰에 넘겨주었다.
투쟁에 앞장섰던 노동자들이 무기를 내려놓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자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일반적 국가기구도 폭력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보다 더 폭력적인 신군부가 이미 형식적 권력기구 뒤편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5월7일 70여 명이 합동수사본부 보안대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았다. 8월4일 1군사령부 계엄보통군법회의는 이원갑 신경을 비롯하여 30여 명에게 5년에서 1년6월까지 징역형을 선고하였다. 고문후유증으로 출감 뒤 세 사람이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많은 사람이 시달렸으나 이런 사정은 부마항쟁이나 광주항쟁과 달리 오랫동안 '사태' 속에 묻혀 버렸다.
"탄광촌은 명예 찾을 자격도 없나"
2003년 방송대 TV에서 8부작으로 <현장증언 이 땅의 노동운동>을 만들면서 사북을 찾았을 때 사북항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사북사태 같은 일이 부산이나 광주 같은 큰 도시는 아니라도 강원도에서도 춘천이나 강릉 원주 같은 깨끗한 도시에서 일어났어도 이렇게 명예회복도 안 된 채 기념관하나 없이 방치되었겠느냐?"고 반문했다. 강원도 첩첩산중 탄광촌의 사북사태를 빼고서는 1980년 봄에 펼쳐진 노동자 민중투쟁을 말하기 어렵다는 대답만으로는 아직도 그들 가슴의 시퍼런 멍이 풀릴 것 같지 않다.
From http://hadream.com/xe/history/42507?ckattempt=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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