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알려진 바 이 기사의 첫 번째 영어 번역본으로, 1908년 〈데어 생디칼리스트〉가 〈Les Temps Noveaux〉의 원고를 바탕으로 펴낸 것을 1977년 “북北 독일 아나키스트 조합”이 다시 펴낸 판본에 근거한다. J. Goddard가 이를 번역하였으며, L. Guenther가 이를 검토하였다. 이 문건은 오래되었음에도, 많은 시사점을 가진다.
생디칼리슴은 대중이 자주적, 자발적으로 결성한 ‘조합(신디케이트)’과 그를 기반으로 경제적 영역에서의 투쟁을 통하여 사회혁명을 쟁취하고자하는 사상을 뜻한다. 한국에서는 보통 생디칼리슴이라 표기하거나, 노동조합주의라 번역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신디케이트’는 협소하게 노동조합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며, 마찬가지로 생디칼리슴이 노동조합만을 기반으로 두고 있는 것도 아니다. 때문에 본 한국어판 번역에서는 생디칼리슴을 생디칼리슴이라고 생소하게 음차하거나 그 운동의 영역을 ‘노동조합’만으로 제한하는 ‘노동조합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넓은 의미로써 조합주의, 혹은 혁명적 조합주의라 번역하였다.
사람들은 항상 “조합주의는 무엇이고 또 아나키즘과의 관계는 무엇이냐”고 묻는다. 이 문건에서 우리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다.
조합주의는 영국의 노동자들이 오래전부터 사용한 성공적인 저항의 수단이자, 경제부문에서 자본과의 투쟁으로 사용한 전술인 ‘직접행동’의 새로운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이 전술은 사실 영국 노동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무기였다. 19세기 전반의 영국 노동자들은 투표권이 없이도 이 전술만을 통하여 중대한 경제적 성과를 얻고 강력한 노동조합을 조직하였다. 그들은 나아가 지배계급이 노동자들의 요구를 입법에 반영하도록 만들고, 나아가 선거권의 확대까지 이루었다.
‘직접행동’은 경제적인 결과와 정치적 양보를 강제하는 두 영역 모두에서 경제 부문의 핵심적인 무기임을 스스로 증명하였다.
영국에서 이 개념의 영향은 아주 강력해서, 1830년부터 1831년에 이르기까지 로버트 오언은 전국 노동조합 총연합(The Grand National Consolidated Trade Union)을 창립하고, 자본에 대항하여 ‘직접행동’으로 투쟁하는 국제 노동자 조직을 만들려 하였다. 하지만 오언은 영국 정부의 박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이러한 생각을 포기하였다.
이 운동은 이후 차티스트 운동으로 계승되었다. 강력하고 광범위하며 한편으로 비밀스러웠던 노동자 조직이 이 운동에 참여해 정치적으로 상당한 양보를 받아냈다. 이 당시 영국 노동자들은 정치로부터의 첫 번째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은 정치적 시위를 모든 수단을 통해 지지하였지만, 이 시위는 그들이 사장과 입법자들에게 파업과 반란을 통해 양보를 얻어낸 것 이상의 경제적 이득을 주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의회로부터 비롯되는 삶의 조건 향상을 기대하는 것이 얼마나 무용한지 알아차렸다.
프랑스 노동자들 역시 동일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1848년의 혁명은 프랑스를 공화국으로 만들었지만 노동자들은 이를 통해 정치적 시위와 정치적 승리가 얼마나 무용한지만을 알아차릴 수 있을 뿐이었다. 노동자들의 삶의 조건의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던 것은 직접행동을 통하여 지배계급으로부터 양보를 얻어낸 것뿐이었다.
프랑스노동자들은 혁명으로부터 또 다른 교훈을 얻었다. 그들은 생산의 새로운 수단을 발견하고 이를 통하여 노동자들이 자신의 몫을 확보하고, 자본으로부터의 착취를 종식시키는 데에 있어 지식인 지도자들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보았다. 그들은 1848년 4월, 6월의 룩셈부르크 협의회와 100명의 민주적 의원이 재석 중이던 1849년의 특별의회 모두에서 무력함을 확인하였다. 이 때부터 노동자들은 그들 스스로가 사회혁명의 주력대오가 되어야만 그것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였다.
자본에 대한 노동의 직접행동과 자본주의적 착취를 제거하기 위한 경제조직 구성의 필요성. 이 두 가지가 가장 산업적으로 발전한 두 나라(영국, 프랑스)의 노동자들이 배운 교훈이었다.
1864~1866년 동안 오언의 생각이 현실이 되어 국제 노동자 조직이 구성되었을 때, 이 새 조직은 위의 두 가지 교훈을 기초 원칙으로 두었다. 파리 국제 박람회에 참석하였던 영국 노동조합의 대표자들과 프랑스 노동자들(프루동주의자들)이 주도하여 국제노동자협의회(IWA)를 구성하였기에, IWA는 ‘노동해방은 노동자 자신의 과제이며, 국제적으로 지지받는 대중 파업을 통해서 자본가들과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IWA의 첫 두 행동은 대중 파업투쟁(영국 노동조합의 지지가 있었던 파리의 파업투쟁, 프랑스와 영국 노동자들이 지지한 제노아의 파업투쟁)이었다. 이 총파업은 유럽에 거대한 소요를 불러왔고, 중산계급에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이와 더불어 국제노동자협의회(IWA)는 더 이상 입법기구와 논의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회의 혁명적 재건을 위한 근본적 질문을 논의하고, 지금껏 가장 효과적이었던 전술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총파업이 그것이었다. 사회 혁명 이후에 사회가 취할 정치적 형태와 같이, 라틴 국가들의 연합은 중앙집권적 국가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반대하였다. 그들은 자유 코뮌과 자본주의적 착취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워진 농업 지역의 연방에 근거한 조직을 선호한다고 밝혔다. 이러한 연방적 연대에 기초하여 지역적 · 국가적 조직을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직접행동과 새로운 사회적 삶의 형태의 조심스러운 건설이라는 현대 혁명적 조합주의의 두 기본원칙은 모두 노동조합의 연맹에 근거하고 있다. 처음부터 IWA의 핵심 원칙은 이 둘이었던 것이다.
IWA 안에는 정치 행동에 대하여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하는 두 조류가 있었다. 라틴 조류와 독일 조류가 그것이었다.
IWA의 프랑스노동자들은 주로 프루동의 지지자들이었다. 그들의 주된 사상은 다음과 같았다. 부르주아 국가기구를 철폐하여 노동자들의 자주적 노동조합 조직으로 이를 대체하고, 그 조직을 통하여 사회의 중요부분을 조정하고 조직하여야 한다. 생필품의 생산과 인간 노동에서 얻은 모든 생산물의 공정하고 평등한 교환, 분배, 소비를 조직하는 것은 노동자 스스로여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할 때에 국가의 역할은 거의 소멸될 것이다. 생필품의 생산, 생산물의 더욱 공정한 교환과 소비는 노동자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만일 노동자에게 그 문제를 해결할 권한이 주어진다면 정부와 관료들은 무엇 때문에 필요하겠는가? 그들이 필요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IWA의 프랑스계 중에는 공화국과 코뮌을 위해 투쟁해 온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정치행동 역시 무시되어서는 안 되며 프롤레타리아가 전제군주정, 공화정, 코뮌 중 어느 체제 아래에 살아가는지 역시 중요한 문제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보수주의자들이나 제국주의자들이 승리를 거두었을 때, 다방면에서 탄압이 들어와 자본과 정부에 대항해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힘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경험으로 인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정치에 무관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노동계급의 해방이 선거의 승리나 수권정당의 교체로부터 이루어질 수는 없다고 보았다.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의 노동자들은 다음과 같은 문구를 IWA의 규약에 적어 넣는 데에 동의했다. “경제적 행동은 모든 정치적 행동에 우선한다.”
영국 노동자들 중에는 정치적 투쟁을 지지하는 상당수의 차티스트들이 있었다. 그리고 독일인은 공화국의 경험이 없었기에 다가오는 독일 제국 의회에 여전히 신뢰감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라살마저도 통일 독일의 사회주의 카이저의 등장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랬기 때문에 영국과 독일 노동자들은 입법운동을 포기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앞의 규약을 다음과 같이 수정하였다. “수단으로써, 정치적 행동을 경제적 행동과 병행한다.”
이렇게 부르주아 의회에 대한 신뢰라는 오래된 개념이 부활했다.
보불전쟁에서 독일이 승리해 파리 코뮌이 붕괴하면서 부르주아 군대가 35,000명의 프랑스 프롤레타리아를 학살하였고, IWA가 프랑스에서 금지된 이후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그들의 추종자들은 IWA에 노동자 후보라는 형태로 정치적인 활동을 다시 불러오고자 하였다.
결과적으로 그간 프롤레타리아에게 희망을 심어주고 부자들에게 공포를 일으키던 IWA는 분열되었다.
라틴국가(이탈리아, 스페인, 쥐라, 동부 벨기에) 연방은 새로운 길을 부정했다. 그들은 스스로의 독자적 연합을 결성하였고, 그때부터 보다 혁명적 조합주의와 아나키즘의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반면 독일은 승전 이후 새롭게 확립된 독일제국 아래에서 비스마르크가 보장한 보편적 선거권에 근거해 사회민주당의 발전으로 나아갔다.
인터내셔널의 분열로부터 4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 결과를 평가할 수 있다. 이후에 더 구체적으로 분석하겠지만 지금의 상황들만으로도 우리는 소위 “현존 부르주아 국가 내에서의 정권 확보”를 신봉하는 이들이 전혀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그들이 믿었던 것처럼 국가를 지배하기는커녕, 국가에 지배되었다. 그들은 국가가 유산계급과 중산계급이 노동자에 대해 가지는 지배력을 유지하는 도구로 전락했다. 그들은 교회, 국가, 자본, 독점경제의 충직한 도구가 되었다.
하지만 유럽과 아메리카 전역에서 우리는 대중의 새로운 운동, 노동운동의 새로운 힘을 목도하고 있다. 그것은 노동자가 자본에 대항하여 집행하는 직접행동과 직접투쟁이라는 인터내셔널의 옛 원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자유를 위해서는 의회가 아니라 스스로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노동자들이 깨달은 것이다.
당연하게도, 이것은 아나키즘이 아니다. 우리는 더욱 더 나아간다. 우리는 노동자들이 중앙집권과 체계에 대한 인식을 철폐할 때, 부자가 빈자를 겨냥하여 만들어낸 법과 빈자가 부자에게 복종하기 위한 질서를 유지하는 공무원들의 속임수를 철폐할 때 비로소 노동자들이 해방될 것이라 믿는다. 이러한 환상과 신기루를 내던질 때까지 노동자의 해방은 성취될 수 없다.
하지만 지난 40년간 아나키스트들은 해방을 자신의 손으로 쟁취한 노동자들과 함께, 오늘날까지 의기양양한 자본에 대항하여, 착취당한 노동자의 최후 전투를 준비하는 수단으로 직접행동을 사용하였다. 무가치한 선거운동으로 노동자들을 우롱하는 자들과 투쟁하여 왔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노동대중들 속에서 그들을 일깨우고, 그들이 항구를, 철도를, 광산을, 공장을, 농장을, 창고를 노동조합의 이름으로 점유하고 그곳들이 몇몇 자본가의 이득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체 사회의 이득을 위해 운영되게 하고자 노력해 왔다.
1820~30년 이후 영국에서, 그리고 1848년의 실패한 정치혁명 이후 프랑스에서 노동자들이 직접행동을 통하여 자본과 투쟁하고, 이를 위해 필요한 노동자 조직을 만들어온 과정이 이러한 노력이다.
또한 1866년부터 1870년 사이 인터내셔널 안에서 직접행동과 직접투쟁이 주된 원칙이었다는 것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프랑스의 패전과 파리코뮌의 붕괴 이후, 혁명 세력의 붕괴를 틈타 정치적 요소가 인터내셔널 안에서 중요하게 취급되고 노동운동의 중요 요소가 되어버린 것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 동안 두 조류는 각자의 계획을 가지고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모든 입헌 국가에서 노동자계급정당들이 조직되었고, 의석을 최대한 빨리 늘리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처음부터 예견되었던 것과 같이, 표를 쫓았던 대표자들에 의해 경제적 계획은 재빨리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되었고, 결국 사용자의 사소한 권리를 제약하는 정도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자본주의 체계는 새로운 힘을 얻어 구체제 질서를 연장할 수 있었다. 동시에, 사회주의 정치인들은 유럽 전역에서 점진적 반동의 길을 기획하기 위해 노동자들의 표를 얻고자 하던 부르주아 급진주의 정치인들과 경쟁해야 하였다.
그들이 대중에게 전파한 이념, 사상, 그리고 관념은 하나의 목표에 집중한다. 그들은 중앙집권국가의 지지자들이며, 지방자치와 소국 독립의 반대자들이다. 그들은 그 결론을 지지하기 위하여 역사철학을 창안했다. 그들은 “사적 유물론”이라는 이름으로, 자본가들이 상호경쟁으로 파멸하여 그 수가 줄지 않는 한 사회주의적 방향에는 근본적 변화가 없을 것이라 설파하며 대중의 희망에 찬물을 끼얹는다. 그들의 관측 바깥에는 산업화된 국가에서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 있다. 영국, 프랑스, 벨기에, 그리고 다른 국가의 자본가들은 손쉽게 산업화되지 않은 국가를 착취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그들은 동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수백만의 노동력을 통제한다. 결과적으로 타인의 노동으로 살아가는 유럽인의 수는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결코. 사실 그 수는 꾸준히, 그리고 큰 폭으로 늘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 수가 늘어감에 따라 자본주의 국가체계에 굴복하여 이득을 얻는 사람의 수도 늘어나고 있다. 마지막으로, 현존 국가 내에서 정권을 잡기 위한 정치적 소요를 가장 부르짖는 이들은 그들이 정권을 잡는데 방해가 되는 모든 것에 반대한다. 그들의 의회 전술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인터내셔널에서 축출되었다. 그들은 파업을 승인하지 않았고, 나아가 그들의 회의에서 총파업이 요구되었을 때, 그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를 거부하였다.
이러한 전술은 40년 내내 시도되었지만 오늘에 와서야 유럽의 노동자들이 이에 지쳐있다는 사실이 확연해졌다. 많은 노동자들은 이 전술을 역겨워하며 거부한다. 이것이 지금 “조합주의”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이다.
하지만 지난 40년간 노동계급의 자본에 대한 직접적 투쟁을 대변하는 다른 조류 또한 정부의 박해와 자본주의 정치인의 매도에도 불구하고 발전해 왔다. 이 조류의 꾸준한 발전을 추적하고 사회민주당 · 아나키스트들과의 학술적, 인간적 관계를 분석하는 것은 흥미로울 것이다. 하지만 이 문건에서는 그러한 작업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인격의 영향에 대해 주목하고자 한다. 현대 사상의 영향과, 미국과 유럽 노동자들 속에 자라나는 자신감은 학술적 선구자들에 의해 독립적으로 확보된 것이기에, 그들에 주목하는 것이 조합주의의 진정한 역사에 관해 서술하는 데에 더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노동대중이 대공장에 모여 과거의 형태로, 공개적 또는 비밀리에 조직하여 힘을 기르면서 고용주의 착취와 오만을 억제한다는 사회주의자들의 가르침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사실들에 관해 이야기해야 한다. 조직된 노동대중이 커지고 강해짐과 동시에 그들은 프랑스혁명 이후 핵심적 투쟁대오의 참된 목표, 즉 반자본주의적 경향에 대하여 더욱 확고하게 인지하게 된다.
여러 국가의 정치적 지도자들이 노동자의 반항을 억제하고 위협적인 개인을 억누르려 했던 지난 40년간, 우리는 노동자들의 반란이 더욱 거세지고, 어느 때보다 강고해지고, 노동자들의 목표가 더욱더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을 목도했다. 그들은 단순하게 절망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멈추었다. 우리가 노동자들을 만날 때, 우리는 “산업 젠트리들은 꺼져라! 산업을 운영하는 것이 그렇게 힘들어서 우리의 생존도 보장할 수 없다면, 꺼져라! 그렇게 시야가 좁아서, 새로운 생산방식으로 더 큰 즉각적 이익만을 추구할 뿐 누구와도 공감하지 못한다면, 양떼마냥 너희에게 해로운 것이건 이로운 것이건 공격하기만 할 것이라면, 꺼져라! 끝없는 전쟁 속에서, 다른 강도를 강도질하기 위해 총 생산의 3분의 1을 써야만 한다면, 꺼져라! 현대 과학의 놀라운 발견으로부터 배운 것이 도시 인구 3분의 1에 해당하는 극빈층을 착취하여 돈을 버는 것뿐이라면, 꺼져라! 이런 방식으로만 산업을 운영하고 무역을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꺼져라! 이 자본주의의 역병을 근절할 수만 있다면, 우리 노동자들이 생산을 더 잘 조직할 수 있다!”라는 말로 대변되는 목소리를 듣는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모든 문명화된 세계의 노동자들과 논의하고 투쟁해 온 개념이다. 생디칼리스트들은 항만 파업을 통해, 철도 파업을 통해, 광산 파업을 통해, 농장 파업을 통해, 그리고 마침내 총파업을 통해 노동자들의 반란을 위한 토양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투쟁은 순식간에 핵심적 투쟁으로 자라나 마치 자연재해와 같이 강대한 힘을 지니고, 의회에서의 국지전이 마치 아이들 장난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독일인들이 선거권의 확대를 적기赤旗와 횃불로 축하하고 있는 동안, 경험이 많은 서유럽 노동자들은 노동자들의 내부 조직화라는 더욱 중요한 임무를 조용하게 시작했다. 서유럽 노동자들이 더 중요하게 생각한 그 개념이야말로 진정으로 본질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노동과 자본 사이의 필연적 갈등의 결과는 무엇일지”, “그 결과로 산업시대의 삶과 사회 조직은 어떤 새로운 형태를 가지게 될지” 자문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오늘날의 무지한 정치인들이 새로운 양 받아들이고 있는 조합주의 운동의 진정한 기원이다.
우리 아나키스트들에게 이 운동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혁명적 조합주의 경향이 인터내셔널에서 드러난 것을 환영했다. 우리는 독일의 정치혁명주의자들이 정권 장악에 방해가 되는 조합주의 운동을 공격할 때 그 운동을 지지했다. 우리는 세계의 노동자들에게 그들의 노동조합을 통하여 인터내셔널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스페인 운동의 예를 따를 것을 권고했다. 이때부터 우리는 노동운동의 모든 단계를 흥미롭게 바라보았고, 노동과 자본의 다가오는 충돌이 어떻게 되든 간에 모든 부富의 생산자들이 사회에 대하여 눈을 뜨게 하는 역할은 혁명적 조합주의 운동에 있다. 혁명적 조합주의 운동은 사람들에게 현대 자본주의가 우리 세대에 가한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나는 길을 보여주는 유일한 운동이다.
사회 재조직과 관련해서 조합주의 운동에 대해 이해를 제공한 것이 아나키스트임은 말할 것도 없다. 아나키스트들은 인간성을 진보적 진화의 방향으로 이끄는 지적知的 운동의 지도자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한 적이 없다. 하지만 우리 아나키스트들은 오늘날의 조합주의를 구성하는 사상, 고드윈, 하지킨, 그레이와 그 후계자들, 그리고 프랑스에서 프루동이 주장한 그 사상, 생산과 분배와 교환을 위한 노동자의 조직이 현존하는 자본주의적 착취와 국가를 대체해야 한다는 그 사상,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이 노동자 조직의 의무이자 임무라는 그 사상이 등장할 때부터 그 중대한 중요성을 바로 인지하였다는 것만큼은 분명히 선언할 수 있다.
혁명적 조합주의의 두 근본적 원칙은 우리 아나키스트들이 만든 것도, 다른 누가 만든 것도 아니다. 노동자들의 삶 그 자체가 노동자들을 19세기 문명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이제 그 원칙을 실현시키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 하겠다. 하지만 우리는 사회민주주의 정치인들과 유사철학자들이 혁명적 조합주의 운동을 짓밟던 암흑기에 우리가 그 운동을 이해하고 지지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혁명적 조합주의 운동을 진실로 지지한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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