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선거 보궐선거에 대한 <아나키스트 연대>의 관점

2021년 3월 29일 아나키스트 연대 발간

Submitted by dogej63 on April 1, 2021

1. 지자체장 및 지방자치의원에 대한 보궐선거가 열흘 앞으로 다가왔다. 솔직히 뭐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2. 우리는 선거를 통한 사회 변혁의 가능성을 부정한다. 나아가 선거를 통한 지배자의 교체가 일말의 개량적 가능성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사회를 변혁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조직하고 투쟁하는 인민대중의 직접행동뿐이고, 최소한으로 사회를 개량할 수 있는 것 역시 그 인민대중의 혁명적 직접행동의 패배에 따른 타협뿐이라고 바라보기 때문이다.

3. 하지만 이번 보궐선거는 이정도의 논증조차 필요하지 않다. 그 누구도 체제의 변혁을, 심지어 체제의 개량조차 이야기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더 이상 인민대중에게 “본인들의 전망”을 이야기할 최소한의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대놓고 “정권 심판”이나 “적폐 청산”을 이야기한다. 그들은 이제 대놓고 “내가 차악이니 차악을 고르라”고 말한다.

4. 하지만 우리는 묻는다. 무엇이 “악”인가? 우리에게 “악”은 이 체제 그 자체다. 수년에 하루, 자신에게 표를 달라고 사정할 때에만 인민이 주인이 되고, 나머지 기간은 그들이 인민의 주인이 되는 체제. 개혁세력이 권력을 잡으면 노동조합의 파업을 경찰로 막고, 보수세력이 권력을 잡으면 그 파업을 경찰특공대로 막는 체제. 누가 선거에서 당선되건, 경찰은 인민대중의 투쟁을 진압하고, 그 와중에 자본가는 헬기로 출퇴근하는 체제가 우리에게는 “악” 그 자체다.

5. 그렇기에 우리에게 “최악”과 “차악”이란, “악”의 경중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이 체제를 어떠한 방식으로 유지보수하는가의 차이일 뿐이다. 보수양당이 흔하디 흔한 방법으로 체제를 보수하건, 국가혁명당이 ‘참신한’ 방법으로 체제를 보수하건, 우리에게 이는 하등의 차이가 없다.

6. 그렇다면 우리는 소위 “진보”후보에게, 혹은 “노동자 계급 정당”에게 투표하여야 하는가. 지난 총선에서 보수정당에 기생한, 혹은 기생하려다 손절당한 당들이 정말로 “진보정당”인가 뭔가 하는 그건지에 대한 논의는 제쳐두더라도, 어쨌든 그래서 그들을 투표를 통해 지지하는 것이 사회의 변혁, 혹은 최소한 개량을 촉발할 수 있는가.

6-1. 우선, 그들이 선거를 통하여 당선될 수 있을 때를 상정하여 보자. 현 체제의 변화 필요성에 대한 인민대중의 의지가 모였고, 그 의지가 선거에서의 표를 통하여 드러나는 상황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상황을 상상해보며 외려 궁금한 것은, 어째서 이러한 정도의 조건에서, 인민대중의 직접행동과 직접투쟁을 조직하려하지 않고, 투표소에서 기표도장을 누른다는 행동만으로 인민대중의 역할을 제약하려 하는 것인가? 이는 결국 인민대중의 역량을 과소평가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인민대중이 스스로의 행동과, 스스로의 투쟁으로 사회의 변혁을 만들어내는 것이 요원한 일이기에, 누군가가 그들을 “대리”해야한다고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6-2. 반대로, 그들이 선거를 통하여 당선될 수 없을 때는 어떠한가. 과반수의 논리가 지배하고, 정치적 야합이 정치적 의사결정의 근간이 되는 “대의 민주주의” 속에서, 그들의 출마와 그들에 대한 투표가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시작은 “정당”을 통해 체제를 변혁하고자 하더라도, 결국 이 제도 속에서 선택지는 둘 뿐이다. 하나. 중위결의 논리에 따라, 우경화한다. 하나. 우경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존재의 의미가 없을 정도의 덩치가 되어 장렬히 산화한다. 민주노동당, 통합진보당, 정의당, 노동당 등의 모든 정당의 역사가 이를 귀납적으로 증명하지 않는가. 무엇을 근거로 “이번에는 다를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가. 체제와 그 제도는 그대로인데 말이다.

6-3. 그렇다면, 아예 처음부터 당선을 바라보지 않고, 선전과 조직확대를 위해 출마하였다고 말하는 경우는 어떠한가. 이러한 후보에게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이 어떠한 다름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의문이 들지만, 더 본질적인 것이 마음에 걸린다. 그렇게 출마할 비용을, 시간을, 조직의 역량을, 대중의 직접행동을 위한 조직을 만드는 것에 투하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노동자들의 조직을 건설하는 이유가, 차기 선거의 선거운동원을 차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투쟁을 조직하기 위해서이면 안되는 것인가.

7. 무엇보다, 앞서 말하였듯, 우리에게 “악”은 특정한 정당이나 후보나 이념그룹이 아니라, 그들이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체제 그 자체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든 활동의 국면에서, 이 “체제”를 가장 본질적이고 효과적으로 타격하고, 체제의 파괴로 다가갈 수 있는 고민을 하여야 한다. 이번 선거 국면에서, 그 전술은 무엇인가.

8. 대의민주제는, 보편선거권은 분명 인민대중의 투쟁과, 그 투쟁 속에서 흐른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제도이자, 우리의 권리다. 하지만 동시에, 이 체제를 유지하는 근간이 되는 제도이기도 하다. “저 새끼가 지금은 우경화됐지만, 그래도 내가 선출한 우두머리”라는 환상, 혹은 “이번에는 안됐어도, 그래도 득표율이 저번보다 1% 올랐으니까 다음에는 내가 좋아하는 우두머리가 당선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만들어내는 것. 이 환상과 기대 속에서, 체제를 변혁하기 위하여 직접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선거를 기다리게 하는 것. 우리에게 이것이야말로 보편선거의 본질이다.

9. 그렇기에 우리 <아나키스트 연대>는, 우리의 소중한 보편선거권을 이용하여, 적극적이고 공개적으로 투표의 거부를 선택한다. 우리의 우두머리로 누구를 원하냐는 질문에, “아무도 원하지 않는다”는 답을 내어놓는다. 누가 최악이고 차악인지 가리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똑같은 “악”의 수립에 복무하기를 거부한다. 이는 선거에서 무효표를 제출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투표율의 상승조차, 우리가 “선거”라는 수단에 흥미를 보임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선거를 기권하겠다는 것 역시 아니다. 우리는 선거라는 기만적인 수단을 무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의 변혁과 개선이 투표소의 종이쪼가리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직접행동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바라봄을 천명하는 것이다.

10. <아나키스트 연대>의 회원들에게, 우리에게 관심과 지지를 표명해온 이들에게, 한국에서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라고 지칭하는 동지들에게 호소한다. 투표를 거부하자. 이 거부를 적극적으로 조직하자. 투표 거부의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히자. 선거가 제공하는 환상과 기대감으로, 우리의 투쟁을 묶어둘 수 있다고 바라보는 저 지배계급에게, 더 이상 그것이 먹히지 않는 우리가 있다고 알리자.

11. 체제의 변혁은, 변혁적 정당의 집권 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체제를 지탱하는 보편선거제가, 그 기만에 대한 조직적이고 공고한 무시로 무너질 때, 비로소 변혁의 단초가 찾아올 것임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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