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엘로 트루다」,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자의 조직적 강령』 서평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자의 조직적 강령』(이하 『강령』)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패작이다. 앨런 맥시몽이 1989년 번역본에 서론을 붙이며 평하였듯, “오늘날, 『강령』은 결코 완벽한 계획이라 볼 수 없다. 1926년에도 『강령』은 완벽하지 않았다. 이 문건은 그 사상의 일부분을 충분히 깊이 설명하지 않았다. 『강령』은 중요한 문제를 전혀 다루지 않기도 했다.” 네스토르 마흐노를 필두로 한 그들의 아나키스트 그룹은 당대 다른 아나키스트들에게 그들이 함께 동의하여 행동의 준칙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을 만들자고 제안하였으나, 이 다음에 살펴볼 볼린 등의 비판 내지는 비난을 정면으로 맞이해야만 했다.
아마도 마흐노의 이 제안은 그의 경험, 즉 우크라이나에서 볼셰비키와 맞서 싸웠으나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일에서 기인할 것이다. 그는 1917년 러시아 혁명 후 노동자 민중을 배반하고 “이행기”를 내세운 볼셰비키에 맞서 우크라이나 등지에서 그들에 대항해 무장 투쟁을 벌였으나 패배한 뒤 프랑스로 도망쳐야만 했다. 그리고 그는 이 원인을 아나키스트들이 조직적으로 투쟁할 수 없었던 것이 원인이라는 판단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에 대해 당대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즘을 볼셰비키화 한다는 비판을 가했다.
그리고 이는 이 문건을 번역한 우리 역시 동일한 지점에서 『강령』에 대한 비판을 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이후 볼린 등이 작성한 『강령에 대한 러시아 아나키스트들의 답변』에서도 살펴보겠지만 『강령』은 만들어질 총동맹이 권위주의적이고 볼셰비키화 될 부분에 대한 제어 장치를 납득이 가능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다. 볼셰비키를 막기 위해서는 볼셰비키와 같은 정도의 힘의 집중이 필요하다는 논리는 아나키즘의 대의를 원칙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강령』을 매우 세심하게, 비판적으로 독해해야만 할 필요성에 대해 이 자리를 빌어 다시금 강변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 실패는 그저 실패로만 치부하기에는 많은 것들을 남겼다. 아나키스트들의 투쟁에 결여되어 있던 것에 대한 고민, 자칫 잘못 발을 디디면 노동자 민중, 혁명 따위는 전혀 관심 없는 일이 되어버리는 개인주의적, 에고이즘적 아나키스트의 행태에 대한 고민 등, 그리하여 이 고민들은 당장은 실패처럼 보였으나 스페인에서 독재와 맞서 싸우는 노동자들의 조직을 건설하는 것으로 그 첫 봉오리를 틔워냈다.
결국 『강령』의 의의는 『강령』의 내용이나 『강령』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강령』의 의의는 아나키즘의 대의를 따르는 여러 다양한 이들에게 생각의 지평을 넓히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것, 그리고 이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할 장을 마련했다는 데에 있다. 아나키스트 연대 역시 『강령』을 위시한 이후 몇 작품의 번역을 소개하여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여러 아나키스트들과 토론의 장을 마련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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